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혁명 (문단 편집) === 10월 혁명 이후 === 혁명은 성공했지만 권력을 막 잡은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은 취약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대다수가 아직도 사회혁명당을 따르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적지 않은 민중들이 소비에트가 정부의 역할까지 맡는다는 것에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망친 케렌스키와 타협파 정당들은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다.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사관생도들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으로 사기가 충만한 볼셰비키에게 이들은 12월 초(11월 말)에 모두 분쇄되었다. 노동자와 빈농, 병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조에 착수했다. 공산주의적 생산과 인민경제 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인민경제회의'가 창설되었고, 지방에서도 각급 국민경제회의가 만들어졌다. 남아있던 봉건제의 유물도 일소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학교는 교회에서, 교회는 국가에서 분리되었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11월 15일(11월 2일) 공포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러시아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평등권을 법령으로 확립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인민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힘을 쏟았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그들은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부르주아와 지주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다.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고 노동조건도 개선되었으며, 산업재해와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되었다. 학교교육과 의료서비스도 모두 무료로 제공되었다. 황제의 궁전과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집회장, 요양소,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임시정부가 예전에 약속한 제헌의회 설립을 예정대로 이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혁명 이후에도 제헌의회 설립은 여전히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확보려고 노력했다. 민중들에게 의회제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것도 이들의 의도였다. 11월 25일(11월 12일), 20세 이상 모든 남녀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의 원칙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이 40% 득표로 제1당, 볼셰비키가 24%로 제2당이 되었고 나머지 표는 기타 정당이 나누어 가졌다.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업 중심지, 군주둔지에서 지지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은 농촌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정상적으로 의회가 작동한다면, 볼셰비키는 물러나야할 판이었다. 반소비에트 세력은 제헌의회를 통해 다시한번 설욕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사회혁명당 우파의 체르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헌의회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소비에트 권력과 대치시켜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의원의 소환권을 도입하고,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제헌의회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이견이 표출되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를 혁명의 기둥으로 삼아 제헌의회를 견인하여 혁명과업을 이루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백배 천배 민주적인 제도'라며 제헌의회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천명했다. 1918년 1월 17일(1월 4일), 소비에트 중앙집행위는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1. 러시아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이다. 2.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다. 3.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다. 4.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할 것이다.|| 1월 18일(1월 5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중앙집행위 위원장 스베르들로프가 위의 선언을 인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파인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볼셰비키들의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제헌의회는 제안을 거부하고 사회혁명당 우파가 마련한 별도 법안의 심의에 들어갔다.[* 이때 제헌의회는 러시아 민주 연방 공화국(Russian Democratic Federative Republic)을 선포했으나 다음날 제헌의회가 해산되면서 곧바로 폐기된다.] 17시간의 토론 후 의회는 휴회했지만 소비에트 중앙집행위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서 제헌의회는 단 하루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고작 2개월 존재한) 의회해산에 무덤덤하게 반응했지만 의회의 활동을 기대했던 시민과 지식인들은 볼셰비키의 조치에 수긍하지 못했다.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렸으며 일부는 [[러시아 내전]] 때 볼셰비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 열린 제3차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는 제헌의회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여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확고하게 잡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